"그렇게나 혐오스러웠던 인간으로서 살았던 삶을 다른 것으로 만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위대한 천재가 분명하다."작가이자 종군기자로 이름을 날렸던마사 겔혼이 남편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이혼하기 직전이던
1945년에 헤밍웨이를 요약한 말이다.
헤밍웨이는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약한 사람을 괴롭 히며 골목대장질을 했고 툭하면 싸움질이었으며 늘 바람을 피웠고 또 술에 절어서 살았다. 그러다가 결국 자살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흠모하는 천재가 슈퍼히어로이길, 즉 인간이라는 종의 가장 고결한 존재 이길 바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1934년에 "인류의 수준 및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드높이는 데 가장 많이 기여한 위인들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함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재들은 습관적으로 우리를 실망시킨다.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확실이 그렇다.
하지만 잘못은 천재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천재의 기준이 그 사람의 인성이 아니라 업적임을 쉽게 잊어버린다. 인성과 업적은 서로 전혀 상관없는 독립적인 변수임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린다. 인성만으로 보자면 천재라고 해서 평범한 사람보다 특별히 더 나을 게 없다. 실제로는 천재가 더 못돼 보인다. 왜냐하면 천재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개인적인 관심사에만 온통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간은 천재의 편이다. 시간이 흐르면 그들이 저질렀던 개인적인 일탈 및 잘못은 희미하게 흐려지고 그들이 사회에 기여한 공로만 부각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노벨상이 수여될 때 함께 수여되는 상금이 노벨이 다이너마이트와 포탄을 만들어서 판 수익금을 종잣돈으로 한다는 사실과 옥스퍼드대학교 로즈장학재단은 세실 로즈가 당시에 영국 식민지였던 로디 지아에서 아프리카인의 노동을 착취해서 번 돈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사람들의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천재와 관련된 부정적인 연상은 점점 사라진다. 그리고 그의 잘못된 개인적인 습관들은 정상적이었던 것으로 바로잡힌다. 소설가 에드몽 드 콩쿠르가 1864년에 말했다.
"천재는 죽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모범적인 인간으로 꼽을 수 있는 천재가 과거나 현재에 있을까? 역사의 백미러로 바라볼 때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마리 퀴리 그리고 찰스 다윈이 존경받을 만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알렉산더 플레밍과 조너스 소크는 공익을 위해서 일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도덕적인 잣대 및 동기부여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오늘날의 천재들 가운데 몇몇은 실제로 그렇든 혹은 소망으로든 간에 이타주 의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예컨대 오프라 윈 프리는 "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이 가져본 적 없던 기회를 주는 것 을 무척 좋아한다. 왜냐하면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우리에게는 윈프리의 진정성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일론 머스크도 인류 구원이 자기 목표라고 천명한다. "나는 인류가 지구 이외의 다른 행성에도 거주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기여하고 싶다"고 말함으로써, 지구가 점점 사람이 살 수 없는 행성이 될 때 사람들을 화성으로 이주시키겠다는 자기의 목표를 암시한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들리는 말을 종합하면 머스크는 가족과 친구와 직원을 거칠고 무례하고 냉정하게 대한다. 마크 저커버그도 마찬가지다. 그는 "페이스북은 연결과 공유를 위한 것이다. 친구와 가족과 공동체를 연결해서 그들이 정보를 나누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페이스북에 접속해서 서로 연결하고 정보를 나눌 때 저커버그는 우리의 데이터를 팔아서 이득을 취하고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 사항에서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침해하고 있다.
몇몇천재들은 도덕적이지만, 의식하든 않든 간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법칙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파괴하고 있다. 어떤 천재들은 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제도를 파괴하며, 또 어떤 천재들은 자신의 강박관념을 충족시키기 위해 정신적인 에너지를 끌어내는 수단으로서 사람들을 파괴한다. 파괴 행위를 하는 것만으로는 천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창의적인 천재는 파괴라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1995년에 중국의 설치 미술가 아이 웨이웨이는 한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100만 달러짜리 자기를 번쩍 들어서 바닥에 내동명이쳤다. 전 세계의 미술 애호가들이 깜짝 놀랐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가 전하려던 메시지는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려면 낡은 관습과 습관과 문화를 파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2년에 하버드대학교의 경체학자 조지프 슘 페터는 기존의 기술이나 산업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새로운 기 술이나 산업을 일으킬 수 없음을 주장하려고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을 공식화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역임했던 앨런 그린 스펀은 창조와 파괴 사이의 공생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파괴는 창조의 불행한 부작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파괴는 창조의 핵심 요소이다."
디지털의 발전이 진행됨에 따라서 최근에 일어났던 창조적인 파괴의 '불행한' 희생자들 가운데서 몇몇을 꼽자면 은행 창구 직원, 식품점 점 원, 여행업체 직원, 사서, 기자, 택시 운전사, 생산공장의 조립라인 노동자 등이 있다. 웨이웨이가 극적인 행위로써 주장했듯이 파괴는 우리가 진보의 대가로 지불하는 비용이다. 이런 파괴들은 지금도 빠르게 진행 되고 있다. 그럼 우린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사라져 가는 직업들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참고서적>
히든 해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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