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벽화에 담긴 그림 속 지혜
어린아이들은 그림을 보면 도화지 속에 그림과 글이 함께 그려진다. 아이들은 그림과 글을 따로 떨어뜨려 놓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둘을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는 본격적인 미술 행위가 시작한 원시 시대에도 나타난다. 인류가 인간의 언어가 아닌 짐승처럼 소리를 내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정교한 언어를 쓰게 된다. '배고파', '도망쳐', '아파'와 같은 단순한 생각들이 아니라 정교한 언어를 써야만 표현할 수 있는 한차원 더 높은 수준의 생각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발달한다. 그런 생각들이 가능한 정도로 인류의 의식이 발전한 다음, 그 생각을 서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미술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실제 언어와 미술은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 어린 아동들의 그리기를 보면 문자를 형상으로 인식해 그림을 그리듯이 기호와 문자 그리고 다양한 시각의 형상들이 함께 보이는 것이다. 미술이 시대와 지역을 넘어 이어지는 것은 사람의 표현 언어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아이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서툰 단어의 의미를 좀 더 섬세하게 이야기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아이의 그림에 어른 시각으로 보는 정확한 조형성을 가르쳐 주는 것은 옳은 미술 교육일까?
인간은 원시인류의 머리뼈 화석을 분석해 보면, 인류는 17만 년 전쯤에 비로소 언어를 쓸 수 있는 구강구조를 갖게 됐다고 한다. 신체적 조건이 갖춰졌다고 바로 언어를 쓸 수 있었던 건 아니겠지만 한가지 지표로 삼을 수는 있다. 그런데 이보다 정확한 답변은 '원시미술'을 통해 알 수 있다. 대략 4만년 전에 정확히 어떤 계기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류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때부터 미술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벽화와 조각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석기는 더욱 정교해졌고 인류는 세계로 마구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지적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 시기부터 인류는 현대인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만큼 정교한 언어를 쓰고 멋진 미술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 이때부터는 좌우대칭의 주먹도끼 정도가 아니라 현대의 갤러리에 전시해도 좋을 만큼 놀랍고 신비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 같기도 어떻게 보면 원숭이처럼 보이기도 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유골을 분석해 보면 평균수명이 15세 안팎이었다고 한다. 자연 수명이 15년 정도였던 건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에 의한 여러 가지 원인으로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은 개체가 그만큼 많아 평균수명이 낮아진 것이다. 그럼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자손을 남기고 현생인류로까지 진화를 계속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는 인간이 '사회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지금까지 유지해 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쥐처럼 무조건 새끼를 많이 낳아 개체 수를 늘릴 수 없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한 번에 새끼 한 마리를 낳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바꾸어 말해 일단 태어난 새끼를 잘 키우는 것,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을 때까지 지켜주는 것만이 개체 수를 늘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늘날의 아이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남겨진 유골에서 보듯,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15세 안팎으로 죽은 경우가 허다했다. 아이를 낳던 도중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핏줄로 이어진 부모만이 자식을 돌봤다면, 수많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어린이가 어른이 되기 전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많은 학자는 그래서 무리의 지혜로운 노인들이 아이 양육을 맡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절부터 사회적인 존재였다고 말한다. 성인이 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사냥을 가면 그 무리 중 가장 지혜로운 노인들은 아이를 돌봐주며 그렇게 서로를 보듬으며 사나운 맹수들과 혹독한 추위에 지지 않고 근근이 살아남아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로까지 진화된 것이다.
미술하는 인간이 살아남았다.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되어 가고 있을 때, 우리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대대적인 미술 작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석기도 그 시점에 발맞춰 급격히 발전했다. 이걸 일컬어 '인지 혁명'이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혹시 이와 같은 발달, 정확히는 미술의 출현에 현생인류 생존의 비결이 있었던 건 아닐지 생각합니다. 우리는 호모 그라 피쿠스 Homo Graphicus, 즉 미술을 하는 인간이었기에 살 아남 있던 게 아닐지 하는 겁니다. 얼핏 보면 미술과 생존이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는 나보다 강한 적을 물리칠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우리 팀'을 만들어 힘을 모으는 거예요. 네안데르탈인 한 명과 호모 사피엔스 한 명은 상대가 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이 상대해야 했던 게 호모 사피엔스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의 호모 사피엔스 무리, 나아가 사회 전체였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여기서 말하는 협력이라는 건 한 번의 전투에서 무리를 지어 상대를 공격하는 수준이 아니다. 개인이 안정적인 사회를 만들고, 개인의 수명이 다한 뒤에도 그 사회를 지속시켜 나가는 중 차원의 협력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공유하는 가치와 원칙이 있고, 서로의 복잡하고 정교한 생각을 교환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의사소통 방법이 없다면 세대 간의 정보 전달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 점을 전제하고 다시 '미술'에 대해 생각해 보면 앞서 인류에게 정교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의식이 생겨났고, 그 생각을 교환하기 위한 장치로 언어와 미술이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의사소통 능력을 현생인류가 가진 최고의 무기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보고 있다. 언어를 통해, 미술을 통해 현생인류가 복잡한 사회를 조직하고 타인과 깊이 있는 협력관계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개인의 생물학적 수명을 뛰어넘어 사회를 지속시키고 지식과 지혜를 쌓아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네안데르탈인은 우리 조상만큼 정교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해서 도태됐을 가능성이 있다. 동굴벽화 같은 의사소통 능력의 증거도 남기지 못했고 네안데르탈인은 이렇다 할 미술작품이 남아있지 않기에 적어도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만 놓고 보면 동굴벽화를 그린 건 호모 사피엔스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보다 강한 적을 물리치려면 오랜 기간에 걸친 지식 축적과 협력밖에 답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의사소통이 없으면 협력할 수 없으니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언어라든지, 미술이야말로 생존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굴벽화를 통해 우리의 조상이 우리의 것과 다른 것은 그들의 기술 수준이 아니라 그들이 '착상'인 것이다. 처음부터 이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술의 모든 역사는 기술적인 숙련에 관한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어린아이들은 어떨까? 아이들은 어른처럼 언어를 구사하는 표현능력이 떨어진다. 대신 부족한 언어를 그림으로 기호처럼 표현한다. 그러면 우리는 언어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가는 아이의 생각 표현 장치인 미술 그리기를 정형화된 구체적인 묘사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정교한 소통 과정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아이의 말과 그림을 소통의 수단으로 들어주고 격려해 줘야 한다. 아이의 글솜씨와 그림 솜씨는 어린 시절 언어의 사회성을 동반한 소통으로 연결돼 있음을 기억하자. 아이가 맞이하는 미래에 자신의 '생각과 요구'를 기록할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미술교육을 해야 한다.
참고문헌
서양 미술사 -E.H 곰브리치-
난생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양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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