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은 '스스로 인정'하는 주관적이고 절대적인 감정이다.
사소한 상황에서도 '역시 나야','내가 해낸 거야'라며 스스로 뿌듯해하거나 다소 과하다 생각될 정도로 당당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자아도취라는 말을 씁니다.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일수록 이러한 자아도취는 자만이나 교만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감에 대한 정의에 깊이 들어가다 보면 자아도취나 교만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자신감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 누구의 판단도 아닌, '스스로 느끼는 판단'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주변의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판단보다는 나에 대해 내가 믿고 느끼는, 즉 스스로 인정하는 주관적이고 절대적인 감정입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자신이 목표한 바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난 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을 때와 '과연 해낼 수 있을까?'라고 의심했을 때 결과는 물론 과정에서도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부모도 자녀가 소극적이거나 위축된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좀 더 똑똑하게 키우고 싶다는 부모의 의지 때문에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부모의 기대가 지나치면 아이는 무기력해 진다.
일곱 살 아이 영우는 체구도 작고 운동도 잘 못하지만, 놀이에는 매우 적극적이고 또래보다 학구적인 편이었습니다. 평소에 책 읽기가 좋아하고 특히 과학 시리즈 서적이나 성경 관련 서적은 거의 외우다시피 할 정도여서 초등학교 생활에 대해서는 별걱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영우가 다니는 유치원 선생님이 어머니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엄마는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영우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선생님이 관찰한 영우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친구들이 놀리거나 물건을 빼앗아도 방어할 줄 모르고 그냥 울먹거리며 피하기만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선생님이 불러도 말을 못 알아듣는 건지, 안 들리는 척하는 건지 전혀 반응이 없고 그저 혼자 놀이나 책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체구가 작긴 하지만 언제나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밝고 활동적이면서 양보를 잘하는 편이라 친구들에게도 환영받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엄마는 영우와 함께 본격적인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영우를 관찰한 결과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크게 드러났습니다.
"엄마, 저것 하고 싶어"라고 말하다가도 엄마가 잘못 알아들어지 확인하려고 "뭐라고 했니?"라고 되물으면 "아니야"하고는 금세 자기 의견을 감추기 바빴습니다. 또 어쩌다가 별일 아닌 상황에서도 갑자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려 엄마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고, 쉬운 과제는 금방 해내면서도 조금 낯설거나 어렵다 싶은 과제는 회피하거나 조금 시도하다가도 실수가 나타나면 금세 시무룩해지며 포기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유아 교육을 전공한 엄마는 아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온갖 좋다는 학습 방법과 놀이도구를 다 동원하여 정성껏 아이를 키워 왔습니다. 그러다 여동생이 태어나고부터 영우에게 쏠렸던 관심과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죠. 오빠가 된 영우는 동생에게 양보해야 하는 일이 자주 생겼습니다. 그때마다 엄마는 "우리 영우는 참 착하구나"하고 쓰다듬어 주곤 했죠. 그런데 어린이집에서 또래들 과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양보하는 것이 착한 행동이라고 배워온 터라 또래와의 작은 경쟁이나 소소한 갈등 상황에서도 무조건 양보하거나 회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영우는 체구마저 작아 체육 활동이 활발하지 못한 탓에 놀이에 참여하는 횟수도 자꾸 줄어들고 결국은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왕따 비슷한 취급을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상담 과정에서 아이와 함께 놀이하는 상황을 주자 엄마는 몹시 당황스러워했습니다. 인지적으로 아이를 가르치는 것만 아이와의 상호작용이라 생각했던 엄마에게 '놀이를 통한 상호작용'은 낯설기만 했던 것입니다. 역시나 엄마의 놀이 유형은 아이에게 인지적 사실을 다루는 설명이나 무엇을 대답하도록 요구하는 질의응답식에 가까웠습니다. 아이와의 대화도 절대적으로 엄마의 말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아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엄마의 상호작용 방식을 조금 바꿔보도록 했습니다. 엄마가 장황한 질문이나 설명하지 않는 대신 아이의 말을 먼저 듣고 격려해 주도록 하고, 아이 수준의 언어로 반응해 가며 대화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하고자 하는 놀이 형태에 무조건 동의하고(전에는 폭력적인 그것은 못 하게 하는 등 다소 제한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했습니다. 자신감은 스스로 가치 있게 여기는 마음에서 자라나기 때문에, 자신감을 싹틔우기 위해 처음에는 아이의 것을 무조건 인정해 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아이는 매우 소심한 성향이라서 엄마에게 직접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엄마의 관심을 갈망했을 겁니다. 하지만 엄마의 관심은 늘 동생에게만 쏠리고 자신은 번번이 요구가 좌절되면서 더더욱 위축되어 온 것이지요. 어머니와의 놀이 방식이 달라지자 서서히 상호작용의 즐거움에 눈 뜨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점차 자신감도 회복해 갔습니다. 이제는 먼저 장난감을 선택해서 엄마에게 함께하자며 권하거나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 큰소리로 또박또박 자기 생각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처럼 요구사항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거나 감정적인 폭발을 일으키는 모습 등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울음을 터뜨리거나 감정적인 폭발을 일으키는 모습 등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개월 뒤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여전히 책 읽기를 좋아해서 책에 빠져들면 주변 상황에 무심해지곤 하지만,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학교생활에 잘 적응해 나가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무력감'을 가르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자.
미국의 심리학자 셀리그만(M. Seligman)은 개를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한 바 있습니다. 우선 바닥과 벽 전체에 전기가 흐르도록 만들어진 방에 건강한 개 한 마리를 들여보내고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때 바닥에 전기가 흐르면 개는 자극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문을 긁어대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방 어디에나 전기가 흐르고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개의 활동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얼마 후 그 개를 다른 방으로 옮겼습니다. 이 방은 한쪽 바닥만 전 기가 통하고 다른 쪽은 전기가 흐르지 않도록 장치해 놓은 방입니다. 개는 조금만 몸을 이동하면 얼마든지 전기 자극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기 자극을 주어도 개는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고스란히 전기 자극을 참아낼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개는 어떤 시도를 해봐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이미 배워버린 것입니다. 결국 반복되는 실패 경험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무력감을 학습하게 만든 셈이죠. 자기 스스로 무엇을 시도하려 하지도 않고 포기 상태로 무력감에 빠져 있는 이런 상태를 심리학에서는 '학습된 무력감(eared helplesnes)'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지 실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러한 학습된 무력감'은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형성된 무력감이 성인이 된 뒤에도 여전히 한 개인의 삶을 짓누르는 경우도 자주 있죠. 부모는 자녀의 성공적인 삶을 위해 어릴 때부터 좀 더 나은 방법과 지름길을 가르쳐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모들은 자칫 자녀들이 "난 못하잖아", "나는 절대로 혼자서는 할 수 없을 거야" 라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신념, 즉 무력감을 가르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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