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야만 한다. '이런 아이로 자라야만 한다'는 확고한 미래상을 가진 엄마는 아이를 엄하게 대한다. 아이가 뭐만 했다 하면 혼내거나, 꾸짖거나, 엄한 벌을 준다. 거칠게 야단치고 감정적으로 호통을 치기도 한다. 그것을 '엄격함'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진짜 엄격함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아이와 " 오늘부터 현관 청소를 하지"는 약속을 했다고 하자.
약속하고 일주일이 지나 문득 생각해보니 아이는 현관 청소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약속을 지킬거라 믿었는데 아이는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때 꾸짖는 것을 엄격함으로 착각하는 엄마는
"왜 청소를 하지 않았어? 왜 약속을 안 지켜?" 하며 거칠게 호통을 친다.
또는"약속을 어겼으니 저녁은 없어!"라고 벌을 준다.
그중에는 아이를 때리는 등의 강력한 벌을 주는 엄마도 있다.
진짜 엄격한 엄마는 그렇게 꾸짖거나 벌주지 않는다. 대신 반드시 매일 끝까지 지켜본다. 하고 있는지, 하고 있지 않은지를 끝까지 지켜본 후 하고 있다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만약 하고 있지 않다면 "자, 지금부터라도 할까! 하고 다시 기회를 준 다음 칭찬을 한다. 열심히 했다면 칭찬 스티커를 붙여주는 등의 아이디어도 짜낸다. 아이에게 매일 뭔가를 시킬 때는 엄마 역시 자기 자신을 매일 끝까지 지켜본다. 그것이 진정한 엄격함이다. 즉, 진정한 엄격함이란 아이가 아닌 엄마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다.
엄마와 아이 사이의 약속이 지속되지 않는 것은 엄마가 끝까지 아이를 지켜보는 것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매일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 아이도 지속할 수 있다. 공부건 생활습관이건 다 마찬가지다. 일관성과 지속성을 부여하면 아이를 꾸짖거나 호통 칠 필요가 없어진다.
엄마가 '엄격함'을 착각하여 꾸짖거나 호통 치면 아이가 자신의 자아상만 나빠질 뿐이다. 또한 '난 안돼! '라는 사고가 뿌리박힌다. 이런 사고를 지닌 아이가 주체적으로 뭔가에 몰입해 의욕을 불태우거나 '제대로 한 번 해보자' 라는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아이가 약속을 지키길 바란다면, 먼저 엄마인 자신에게 아이를 끝까지 지켜보는 과제를 부여하자.
'내 아이가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아이에 대한 엄마의 애정 표현이다. 예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도, 아이 인생에 레일을 깔아두려는 엄마도 뒤집어보면 다 아이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이 범한 실패를 아이가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아이가 행복한 인생만을 걸어갔으면 하는 엄마의 염원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호통을 치거나 꾸짖을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되길 바란다면 점잖은 말로 예절을 듬뿍 담아 대해야 한다. 자신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하려면 "엄마도 여기서 이렇게 실패를 했어.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하는게 좋을 것 같아"라고 진심을 담아 말해준다. 한 인격을 지닌 사람에게 타인의 기분을 전하고, 자신의 바람 대로 상대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렇게 되었으면'하는 자신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면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엄마는 아이에게 우주 같은 존재다. 그리고 아이에게 엄마의 말이나 행동은 애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이를 호통을 치지 않는 것이 그리 어렵지게 느끼지 않는다. 아이를 훈육할때 생각 해 보자. 나는 아이를 한 인격채로 대하고있는지를 내가 화를 내서 아이가 말을 듣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도 잘못을 느끼고 변화를 위해서 스스로 노력해보려고 하는 지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호통으로 변화 되는것은 한계가 있음을 알아 차려야 한다. 그래야 아이가 일시적인 변화가 아니라 지속할 수 있다.
<참고서적>
엄마의 의욕이
아이의 의욕을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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