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1학년 때 적극적이고, 도전적이며 호기심과 탐구심이 높 은 아이로 교사에게 평가받았다면 그 교사는 그렇게 기대하고 아이를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교실에서의 어떤 행동이 그런 기대를 하게 했고, 아이는 교사의 기대대로 1년간 크고 작은 도전과 호기심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2학년이 되어서 담임에게 넌 왜 그렇게 산만하니?, 제발 좀 조용히 좀 있어라.", 필요 없는 질문은 하지 마라." 등의 상반된 메시지를 듣게 된다면 이유가 뭘까? 아이의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라, 교사의 관점이 변한 것이다. 이 아이의 성장의 가속도가 잠시 멈추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은 누구 의 책임인가?
피커 파퍼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서 말했다. "우리가 학생들을 진단하는 방식이 곧 우리가 제공하는 치료의 종류를 결정한다." 하지만 여러 교사들은 학생들의 상태와 질병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못한다. 그 결과 우리의 ' 환자'가 뇌사상태라 진단해버린다. 그런 판단은 그렇지 않았던 아이들 또한 죽어가게 한다.
그렇다면 왜 많은 교사들이 아이들과의 첫 만남부터 부정적인 기대를 거는가? 요즘 학생들은 무지하고 무례하고 버릇이 없다고, 공부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가정교육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것인가? 학생들의 부정적 행동 뒤에 숨어 있는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교사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 교실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시험에서 몇 점을 맞을지, 친구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지 교실에 받을 내딛기도 전부터 막연히 두려워한다. 아이들에게 교실은 어느날은 친구가 되기도 하고 어느날은 정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교실에서 교사는 먼저 손을 내미는 '갑'이고, 아이들은 이를 받아들 이는 '을'로 출발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교사에게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지, 관심받을 수 있을지 내심 두려워한다. 그런데 교사가 아이가 내게 입힐 피해를 두려워하고 있으면서 그 두려움을 인식하지 못할 때 아이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교사는 아이들에게 경계의 날을 세우며 출발한다.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3월 한달 동안 아이들을 잡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아이들의 두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자기와의 만남, 자기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교사가 두려움에 직면했을 때가 오히려 기회다. 두려움을 넘어 진정한 자신과의 만남을 시작할 수 있다. 자신을 이해하고, 그래서 자신의 두려움 또한 볼 줄 아는 교사가 되어야 아이들의 아픔, 두 려움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교사라면 누구나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고, 아이들을 존중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아이들의 행동을 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한다. 특히 새 학기를 맞을 때면 학급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싶은 열망이 커진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 열망과 달리 현실에서 3월의 하루하루는 아이들에게 웃어주고 존중해주기보다 규칙으로 통제하고 큰 소리로 호통치며 보낸다. 자연히 자신감도 잃고, 자부심도 잃어간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의미를 찾지 못하고 정서적 소진이 일어날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매년 반복되는 것일까? 나 역시 발렁받고 약 7년 동안 매년 아이들을 3월 첫날부터 규칙으로 통제하며 시작했고, 왜 내 진심과 내 선택이 정반대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괴로워했다.
그때 나의 뇌 상태를 이해해보자. 첫해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했을 때 2학기부터 학급의 질서가 무너져 어려움이 많았다. 그 경험이 내 편도체에 각인됐기에 나는 다음 해부터 엄격한 교실을 운영했다. 아이들에게 친절하면 무질서해지고, 가르치기 어렵고 위험하다고 판단 해버린 것이다. 그런 무질서한 교실에서 내가 힘들까 봐, 우리 아이들을 잘 끌고 가지 못할까 봐, 사고라도 날까 봐 조바심 내던 나는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 관대하기보다는 시험케이스로 모든 아이들 앞에서 강하게 통제했 던 것이다. '저 녀석 때문에 반 분위기 다 흐려놓겠네. 아 두려워라: '저 녀석이 여러명 물들이면 어떡하지? 아 두려워라. 그때의 나는 내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깨닫지도 못했지만, 의식하지 못해도 편도체는 두려움 전류를 흘려 보내 내 행동과 판단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한편 좋은 선생님에 대한 전두엽의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열망이 있었기에 아이들은 무조건 통제하기 보다는 가능성을 믿어주고 존중하고자 하는 행동 메시지도 뇌에 전해졌으리라. 결국 편도체와 의식이 전해준 상반된 메시지에서 내 뇌의 행동중추는 어떤 행동을 선택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한 뇌는 편도체의 선택에 손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엄격한 통제를 선택했다. 내가 의도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무의식적 두려움이 내 삶을 이끌어간 것이다.
'폭력을 쓰는 이 아이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큰일 날지 몰라.'
'저런 아이는 변화시키기 힘들어.?
'도저히 안 돼! 포기해야겠어.
'저 아이 때문에 내가 어려움을 겪을지 몰라. 걱징이네!!
이런 마음을 돕고 아이들을 바라보면 아이들은 내가 돌봐주어야 할 존재, 교육해야 한 존재가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경계해야 할 잠재적 문제아로 보인다. 두려움은 미미할 때조차 강력하다. 자극이 엄청나게 강력하고 위험 한 것일 때만 편도체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두려움의 전류를 뇌에 보내는 걸까? 실제로는 아주 희미한 자극, 심지어 자면서 들리는 공포 영화 소리에도 편도체는 우리 의식보다 먼저 반응한다. 자잘해도 스트레스 상황이 지속되면 일상적으로 반응하던 편도체는 지쳐간다. 연이은 스트레스로 인한 편도체의 피로는 결국 더 나쁜 끝으로 이 어진다. 편도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집에서 부모와 아이나,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의 갈등이 장기화되면 적극적으로 대응하던 처음과는 달리 소진된 교사나 부모가 자포자기한 듯 아이를 방치하는 사태를 낳는다. 아이 역시 스스로에 대한 보호본능을 잃어버리고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는다.
장기적 스트레스 상황을 만나면 이처럼 편도체도 과부하가 걸리고 끊어져버린다. 편도체가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우리가 진짜 위험 상황에 처했을 때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 자기도 모르게 오히려 피해야 할 위험 상황을 선택한 후 그 안에서 버티느라 자신의 에너지를 다 소모하는 악순환의 삶을 살게 된다. 집에서 부모와 갈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집을 나간 아이가 있다. 아이는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기 위해 위험한 일을 하다 결국 비행청소년이 되었다. 부모와의 갈등으로 인한 두려움 이 지속되다 보니 편도체 과부하로 퓨즈가 끊어진 후.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두려움 자극으로 가득하다. 문제는 편도체가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자동으로 두려움의 전류를 뇌에 끊임없이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주변에 감동적인 일이 벌어지고 아름다운 것이 펼쳐져도 그 자극은 뇌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뇌는 위험 상황에 집중해 빨리 해결하도록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삶에서는 좋은 일과 괴로운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행복한 일이 아무리 많아도 작은 불행한 가지가 모든 에너지를 잡아먹을 수 있다. 사람은 단 하나의 두려움으로 수많은 행복한 순간, 수많은 긍정적인 경험들을 놓치고 만다.
표면적으로는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인데 걱정, 불안이 많은 사람을 보자. 그 사람을 보는 주변 사람은 그런 삶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늘 노심초사해야 할 것 같은데 평안한 사람도 있다. 이것은 부정적인 뇌의 자극, 위험을 느끼는 민감성의 차이 때문이다. 두려움에 집중하는 사람의 편도체는 더 자주 활성화될 것이고 더 민감해질 것이다. 민감해진 뇌는 두려워할 거리들을 더욱 많이 찾아낸다. 만약 안전한 상황이 오더라도 편도체는 바로 이완되지 않고 관성의 법칙을 발휘해 한동안 뇌 안에서 긍정적 사건들의 해석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봉지의 반이 찼다.' 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봉지의 반이 비었다.'라고 한다. 이처럼 과도하게 활성화된 편도체는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며, 결국 작은 것에서 시작하는 도미노처럼 삶을 흔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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