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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삶의 가치를 배운다고?

by lowen 2023. 7. 2.

 

안토넬로 다 메시나<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

 

1. 미술로 과연 삶의 가치를 배울 수 있을까?

그림은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1430~1479년)는 초기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한 이탈리아 화가로 평생 메시나를 떠나지 않고 활동했다. 그가 그림을 그린 시대는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의 기운이 태동하던 시기로, 원근법을 중심으로 눈으로 보고 관찰한 세계를 유화의 기법으로 표현하던 때다. 비록 피렌체에서는 아니지만, 이탈리아 나폴리를 비롯해 몇몇 도시를 여행하면서 네덜란드의 사실적 화풍을 경험한 안토넬로 역시 중세풍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는 세계를 세밀하게 표현하는 데 능숙한 재능을 보였으며, 그 대표적 작품이 바로 ‘성 예로니모(St. Jerome)’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특기할 사항들이 있다. 위쪽 창에 보이는 새들은 차치하고라도, 그림 오른쪽으로는 사자가 한쪽 다리를 들고 홀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며, 주인공 아래로는 자고새와 공작이 서로 등진 채 세례 반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성인의 발치 앞으로는 고양이도 보인다. 흔히 성 예로니모가 예술로 표현될 때는 사자가 등장한다. 1270년 수도자들의 교육을 위해 성인들의 저술과 이야기를 발췌 기록한 “황금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예로니모가 머문 수도원에 사자 한 마리가 절뚝거리며 들어왔다. 모두 놀라서 도망가는데, 유독 그만이 두려움 없이 사자에게 다가가 그 발에 찔린 고통스러운 가시를 빼준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동물의 왕 사자가 성인에게 유순한 아이처럼 굴었다는 것은 자연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길들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바로 그의 사상이나 그리스도교 신앙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면 그림의 고양이는 무엇일까? 쥐의 포식자인 고양이는 그리스도교에서 원고를 야금야금 갉아먹기에 성서학자들의 공공연한 적이다. 이 고양이에 비해 그림 전경의 크고 뚜렷한 자고새와 공작은 그리스도교에서 더욱 친근한 동물이다. 자고새는 다른 새의 알을 훔치는 존재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에서 자고새는 젊은이를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악마의 이미지를 갖는다. 물론 그 젊은이들은 반드시 다시 종교로 회귀하는 것이, 유혹에 빠졌던 신앙인들이 하느님께로 반드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공작은 천국의 동물이며, 영원한 삶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작은 로마 시대 지하 묘혈이나 중세의 석관을 비롯해 묘석에 주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공작은 허영과 사치의 상징이었던 바, 그 죄를 사하고 용서받은 자들을 영원한 삶으로 이끄는 세례 반과 성수가 공작과 함께하고 있다. 이들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알아보자면, 동물의 형상과 위치를 비롯해 그림 좌우의 창문으로 보이는 경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왼쪽 창밖은 도시의 모습이며 배를 타는 사람들과 말을 타는 사람들,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반면 오른쪽 창밖은 사람이나 건물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나무와 언덕만이 있는 야생의 상태이다. 안토넬로는 창을 통해 도시와 자연, 곧 쾌락의 세계와 고독의 세계를 대비시키고 있다.



3. 예로니모의 사상은 왜 '금욕'에 기반을 두고 있는 걸까?

예로니모의 저술에서 도시는 그 자신이 육욕의 고통을 겪은 암울한 지하 감옥, 곧 악마로 표현되며, 야생의 세계는 악으로 오염되지 않은 진정한 천국으로 나타난다. 바로 하느님께서 존재하는 곳은 절대 고독의 세계라면서, 예로니모는 우리에게 천박한 삶을 피하고, 천사를 따르며, 그리스도를 찾으려면 야생의 상태를 찾아 도시를 떠나야 한다고 권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 왼쪽의 창은 악마의 세계며, 오른쪽은 하느님의 세계인 것이다. 겉으로야 이렇게 착하고 똑똑한 모범생처럼 보이지만, 사실 성 예로니모도 젊은 시절에는 로마에서 못된 친구들과 사귀면서 인생을 탕진하기 바빴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위인이 그런 것처럼 성 예로니모는 곧 자신의 지난 과오를 깨닫고 뉘우친다. 고행의 좁은 오솔길을 선택한 것이다. 예로니모의 사상은 자기 경험에 비춘 혹독한 금욕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된 많은 서적을 번역했던 인문주의자로, 이 때문에 화가들이 그를 붉은 색 옷을 입은 추기경과 같은 고위 관료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그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이유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책도 둑이자 성적 방 종자인 고양이와 악의 전령인 자고새가 왼쪽을 향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세례 반과 성수, 곧 성령을 모시고 꼬리를 펼쳤다면 허영의 상징이었을 공작이 안전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고, 하느님께 귀의한 존재로서 길든 사자가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악의 세계를 깨끗이 씻고 닦는다는 의미로 왼쪽 벽에는 수건이 걸려있는데, 이미 때가 타서 얼룩이 진 상태이다. 바로 악을 버리고자 노력한 성인의 정신적 흔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악과 성령의 갈림에서 은둔자 예로니모는 세상을 악으로부터 구하고자 인문주의자의 모습으로 독서와 저술에 열중하고 있다. 물론 그의 붉은 옷은 추기경의 옷이자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열렬한 신앙의 표현임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4. 작가의 작품을 보면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을까?

누구도 자기 삶을 빗대어 세상을 바라보지 않은 화가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작품을 볼 때면 항상 나와 다른 인격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상황의 조언자를 그림 속에서 만나게 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 느끼는 일은 아닐 것이다. 유명한 작품이든 유명하지 않은 작품이든 상관없이 무명에 작품을 바라보다가도 문득 저 사람은 한시대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나에게 그림이 위안이 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상황들이 나에게만 생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그림 속에 자신들의 방법으로 의미를 부여해서 남긴 그림들은 나에게 많은 부분을 변화시킨다. 무언가 느끼면 그것이 변화로 이어지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살면서 내 안에 담긴 '틀'이란 것을 만들게 된다. 근데 그 '틀'은 우리를 삶에서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깨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여행이라는 새로운 모험을 통해서 낯선 경험을 통해 또는 힘든 일이 닥쳐서 새로운 변화가 물리적으로 찾아오지 않는 한 쉽게 자신의 '틀'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림을 통해 자신과 낯선 화가들을 통해 그림 속 메시지를 읽어보는 것은 삶에 신선한 충격이 되기도 하고 나와 다른 관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을 알 수 있다. 그럼 이런 다양한 시각에서의 변화를 우리는 어떻게 대하게 될까? 나는 나와 다르다고 느끼는 곳에서 진리를 탐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가진 메시지와 교훈을 우리 것으로 만들면 힘들게만 느꼈던 세상을 더 편안하게 느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그림을 보고 생각하고 이것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분명히 이 그림 한 장으로 갑작스럽게 획기적으로 변화될 수는 없겠지만 서서히 깨닫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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