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렘브란트의 어린 시절
렘브란트( Rembrandt van Rijn)는 1606년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밀러의 9번째 자녀였으며 가난한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릴 적부터 그림에 천재적인 재능 덕분에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몇몇 저명한 예술가들과 함께 미술을 공부하기 전에 지역 라틴 학교에 다녔습니다. 1630년대에 그는 초상화와 역사적 장면을 전문으로 자리 잡습니다.
2. 렘브란트의 역사적 배경
17세기 당시 네덜란드는 마침내 에스파냐의 오랜 탄압에서 벗어나 유럽 최고의 강대국이 됩니다. 이 혁명은 실력으로 자유를 얻는 과정은 독재자와 싸워 이긴 최초의 시민혁명으로 프랑스혁명보다 180년 앞선 일입니다. 그 결과 여전히 유럽 대다수의 나라가 가톨릭이 지배하던 시기에 네덜란드는 신교와 자유의 나라가 됩니다. 이 시기에는 무역과 상업이 발달하여 의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던 네덜란드는 17세기 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변화를 빨리 받아들입니다. 이 시기에는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빛나는 황금기었다. 이 때문에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인물들을 배출합니다. '우신예찬'의 에라스뮈스, 서양 철학계의 이단아 같은 존재인 스피노자, 프랑스인이었지만 이 시기에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며 근대 철학의 아버지가 된 데카르트와 렘브란트가 이 시기에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자유 정신'과 '개인적 의지'를 발현할 수 있는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렘브란트는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정물화, 종교화 등이 유행한다. 각 분야 뛰어난 화가가 나오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풍족해지고 신분이 높아진 신흥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서 집 안에 걸어 두길 원했기 습니다.
3. 렘브란트의 회화의 변화
렘브란트의 회화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1시기는 1630년까지 카라바조의 영향과 함께 로마파 화가 라스트만(Last man-1633의 영향이 두드러진 명암법과 정확한 동작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2시기는 1650년은 전후한 시기에 렘브란트의 독자성이 드러나는 시기로 그는 폭넓은 주제를 풍부한 회화적 기법을 구사하며 다루고 있습니다. 제3시기는 말년에는 렘브란트의 만년 기의 예술은 더욱 심화한 인간에 대한 통찰과 어둠에 가려진 듯 보이는 깊숙한 인간 영혼에 대한 경건한 의지를 보여 줍니다.
4. 렘브란트의 작품세계
렘브란트의 작품세계를 말할 때 '에칭'을 짜놓을 수 없습니다. 동판화의 일종인 에칭이 렘브란트에 의해 미술의 표현 수단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에게 있어서 에칭은 다른 재료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훌륭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는 주로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에칭으로 표현했습니다. 검은 선의 풍요로움과 박력에 찬 색채감으로 화면에 생기를 넣어 주었습니다. 화가로서의 독자적인 화풍을 추구하던 렘브란트는 현실과 맞지 않는 회화작업으로 말년에는 고독하고 가난의 비참한 생을 마치게 됩니다. 렘브란트의 생애는 그 자신의 자화상의 변화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초상화와 자화상은 같은 인물화임에도 초상화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그림 속에 담는 그림이라면 자화상은 자기 모습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자신의 일기 같은 그림입니다. 렘브란트의 젊은 시절과 나이 들어서의 노년의 자화상은 참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일기는 우리의 자신의 일상을 적어 놓는 기록지입니다. 렘브란트도 자신의 내면적인 모습을 일기 쓰듯 사진을 찍어서 기록하듯 그렇게 화폭에 담아 놓았습니다. 일부로 못생긴 얼굴을 꾸미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울 속에 비친 그 자기 모습을 아주 성실하게 관찰했습니다. 우리가 자화상을 보고 금방 아름다움이나 외모에 관해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성실성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의 못 씀에 일부러 어떤 특별한 자세를 취했다거나 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렘브란트 자신의 생김새를 자세히 보고 끊임없이 인간의 표정의 비밀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탐구하려는 화가의 시선이 있을 뿐입니다. 렘브란트가 살았던 시기에는 유럽 전반에 귀족과 왕족, 그리고 지식인들, 화가들마저도 그림을 그리는 전형적인 방식이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 그림 스타일은 정확하고 충실한 데생을 기본으로 하고 명암을 단계적으로 부드럽게 처리하면서 양감을 만들어 내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이런 시대가 원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640년대 후반 이후로 렘브란트는 사회적 명성과 화가의 지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항상 안 좋은 일은 함께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 아내 사스 키워도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예술은 이때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잘 나가던 젊은 시절에 사치와 방탕했던 삶은 일이 없어진 그에게 빚과 빈곤한 삶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결국 1656년 파산선고를 받아 살고 있던 주택과 끝이 없이 모았던 미술품과 골동품 모두 그의 손에서 떠나게 됩니다. 결국 렘브란트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헌 옷 몇 벌과 그림 도구뿐이었습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성공한 화가에서 가장 형편없는 화가의 삶까지 모두 겪었습니다. 그의 자화상은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많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그의 예술세계와 당시 시대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기에 작품은 그의 예술의 새로운 시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형편없는 작품으로 평가받았지만 렘브란트의 독자적인 화풍으로 말년의 곤궁한 삶과는 달리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감동과 호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5. 렘브란트의 작품을 보고 느낀점
화가는 자신의 일생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자화상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화가의 질문 같은 것입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풍경, 인식, 생활습성, 자신이 세상을 바로 보는 마음과 시선을 모두 그림 속에 담는 것 씁니다. 어떤 화가는 무명으로 살대 후대에 유명하게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살아생전에 부와 명예를 모두 누리다가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평생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살았든, 못 살았든 한 인간의 삶이 고스란히 화폭에 담겨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림 속에 이야기처럼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림으로 한 인간의 환경과 그것으로 인한 내면세계를 보게 됩니다. 나도 그들처럼 내 삶의 환경과 내면도 함께 찾아보게 됩니다. 같은 사물을 보고도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입장에서 다른 생각을 합니다. 그림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탐구해 나갈 진지한 열정과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자화상이든 혹은 다른 형태의 그림을 통해서건 누구나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도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의 젊은 날부터 말년까지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했던 화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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